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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는 한들한들 부는 산들바람에 뭄뚱이를 맡겨도 되는 시간이 있다. 스무 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삶이란 조금 비스듬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기차에서 시속 오십 킬로미터의 속도를 견디는 일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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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그들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착각한 건 아니었다. 울타리 너머의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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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체의 단체활동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거기에 관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밍은 생래적으로 하나의 개인이었다. 결코 외톨이인 줄 모르는 외톨이, 빛 없는 선반 위에 따로 보관된 통조림처럼 안전하고 유일한 개체, 스스로 적막할 운명을 타고난 자. 그것이 밍이었다. 혼자 먹을 저녁밥이 담긴 검정 비닐봉지를 천천히 흔들면서 어둑한 타이베이 거리 한 모퉁이를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상상하면 영원히 옥영은 저릿한 통증에 사로잡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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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몹시 비겁했던 적이 있다. 돌아보면 지금껏 비겁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다. 덧없는 틀 안에다 인생을 통째로 헌납하지 않을 권리, 익명의 자유를 비밀스레 뽐낼 권리가 제 손에 있는 줄만 알았다. 삶은 고요했다. 그 고요한 내벽에는 몇 개의 구멍들만이 착각처럼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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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일해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일을 그만두고 타이베이 행 비행기를 탔다. 타이베이에 머물다가 밍과의 관계가 삐덕거린다 싶으면 다시 짐을 싸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면서 차곡차곡 나이를 먹어갔다. 삶은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매일 밤 여행용 트렁크가 위에 놓인 침대 매트리스에서 잠들어야 한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곳에선 여기를 그리워하고, 여기서는 그곳을 그리워했다. 무기력한 습관이었다. 서른이 코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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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작가의 말'을 쓰는 일은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진심을 다해 소설을 썼고, 세상에 내놓는다. 그것이 전부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 세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조금 두렵다.
존경하는 쉼보르스카 여사는 일찍이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단 두가지 뿐. 그들의 수직 비행에 대해 구구절절 묘사하거나, 아니면 마지막 문장을 보태지 않고 과감히 끝을 맺는 것.'
나의 인물들이, 마지막 문장 너머의 그곳에서도 그들의 생을 충실히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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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몸도 마음도 양쪽에 걸쳐두고 살던 시기에 공감하며 읽었던 소설. 뒤돌아보면 나는 늘 새로 살 곳을 찾아보고, 잠시 머물고, 또 떠나는 걸 반복하며 산 사람인데 토론토에서는 처음으로 정착이라는 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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