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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브리북] 박명우, 사람, 삶을 안다는 것

데브리 2023. 6. 29. 06:36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가에 대한 물음.

 

 

 

 

박명우, 사람, 삶을 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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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나'는 '사람의 어려움', '존재의 가벼움'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상처받지 않는가? 무엇이든 다 알거 같고 무엇이든 자신 있어 하다가도 끝 모를 절망에 사로잡히게 되는 '나'는 일상적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고, 그 와중에 마주하게 되는 나는 비이성적이고 극히 연약한 모습으로 남게 된다. 이래도 우리는 '나' 자신을 넘어서는 그 무엇에 관심 없다 할 수 있는가? 심리학과 종교학의 광활한 조각이 아니라도 나는 일상에서 매 시간 죽음을 마주하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는가? 내가 공부하는 것이 내가 일하는 일터가 패러다임의 차이를 극복 못하고 사라질 때 나의 현재도 함께 없어지는 이런 황당함을 어떻게 이겨낼 건가? 우리는 내일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것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면 더 이상의 대화를 진행하지 못하겠지만, 내 안의 어쩔 수 없는 문제 앞에 나는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 위로를 받고 그것으로 인해 인생을 꾸려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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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그리고 자기의 삶이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그러면서도 어쩔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종교의 출발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

 

[예수가 외면한 그 한가지 질문: 열린 종교를 위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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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없는 의사회'

MSF는 다친 몸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상처까지 돌아보는 최소한의 심리치료활동까지 그들의 치료영역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들이 진정 이루고자 하는 것은 전쟁, 기아, 학살 등을 막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가운데 처절하게 고통 받고 넘어져가는 생명들을 향한 최소한의 인간애. 아프고 시리디 시린 고통 한가운데 찾아가서 그들의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다. 인류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을 목표하기 보다는 그들의 절망을 치료하고자 한다. 이것은 고통 받는 생명에 대한 평화적인 저항이며 최소한의 몸부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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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인한 상실에 대해 보통 네 가지 단계가 있다고 한다. 무감각의 단계(numbness)로서 상실의 무게가 실감나지 않아 그냥 멍해지는 시기, 그리워하는 단계(yearing)로서 상실한 대상을 그리워하며 방황하는 단계, 혼란 단계(disorganization and despair)로서 상실을 실감하면서 극심한 상실감과 공허감 그리고 외로움으로 고통 받는 시기, 마지막으로 재조정 단계(reorganization)로서 상실의 무게를 딛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하면서 다시 삶의 즐거움을 찾기 시작하는 단계로 나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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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왜 사는가의 문제 역시 수많은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살아가며 사랑에 의해 살아가고, 사랑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앞날을 계획하는 것으로 충분할 줄 알지만 사실은 '나'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감정을 끄집어낼 때에만 제대로 된 삶을 살게 된다. 이렇게 되어야 사람이 행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이유 없는 사랑의 위대함은 사랑의 진정성으로 힘껏 드러난다. 이유를 가진 사랑은 존재를 속박하고 사랑의 가치를 퇴락시킨다. 그러하기에 사랑하기에 주저 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유 없이 사랑하기를 바란다. 문득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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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통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