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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자신이 그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세계에서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자신에게 떠날 용기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토록 바다를 바라본 것은 단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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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도로가 왜 막히는지 알아? 예, 라디오에서 노점상들이 시위를 벌인다고 했잖아요. 아니야, 지겨움 때문이야. 내가 말했습니다. 신문에서 자살한 노점상에 관한 기사를 읽었어. 마흔세 살. 내 나이와 같더군. 마흔세 살이란 이런 나이야.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 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 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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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좋았어. 우리 참 좋았어. 그렇긴 하지만 우린 이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는 거야." 그 말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고, 또 슬프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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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그녀를, 우리가 함께 보낸 나날들을, 영원히 나를 후회하게 만들고 나를 괴롭힐 게 분명한 그 일들을, 우리가 함께 꿈꿨으나 결국 가지지 못했던 미래를 생각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내게 새로운 여자를 만나면 모든 일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렇다고해도 우리가 함께 꿈꿨던 미래를 다시 찾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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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은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맞다,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일생에 단 한번은 35미터에 달하는 신의 나무를 마주한 나무학자 왕잔의 처지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공룡과 함께 살았다는, 화석으로만 남은, 하지만 우리 눈앞에서 기적처럼 살아 숨쉬는 그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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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한 십년쯤, 아니, 십년은 너무 과한 욕심이고, 당장 내년 이맘때쯤에는 어떨까? 햇살은 여전히 이렇게 뜨거울까? 내년에도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길 밖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들 저렇게들 앉아 있을까? 내년 여름에는 또 어떤 노래가 유행할까?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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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죠? 그 표정을 보니."
나는 생각해봤다. 맞아요. 그랬어요. 십 년은 고사하고 당장 내년 이맘때는 어떨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다음 여름에도 햇살이 이렇게 뜨거울지, 어떤 노래가 유행할지, 다음에는 어느 나라의 이름을 가진 태풍들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그렇게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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