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배우고 생각하고/밑줄긋기

[데브리북] 에쿠니 가오리, 홀리 가든

데브리 2023. 5. 14. 04:44

 
 
내 20대 최애 작가 에쿠니 가오리. 어떨 땐 사놓고 아껴두고 읽기도 하고, 좋아하는 책은 친구들에게 선물하기도 했을 만큼 당시 애정했던 그녀의 소설들. 일본 소설의 인기가 엄청났던 당시의 분위기도 있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연애와 친구 관계 등이 지금보다 훨씬 중요했던 20대의 말랑말랑한 감성에 딱 맞는 류의 글들이라 그 시기에 공감하며 읽기 좋았던 것 같다. 
 
 
 
 
 

에쿠니 가오리, 홀리 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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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감정적으로 처신하는 쪽이 지는 것이다. 불필요한 호의가 사람을 감정적으로 만든다. 
 
시즈에는 오카야마에서 늘, 부상을 입고 귀환하는 병사처럼 애처롭게 돌아온다. 그런데도 본인은 그렇다는 것을 모른다. 정말 즐거웠어, 라고 시즈에는 말했다. 꿈같았어. 지금 신칸센 타고 올라가는 중이야. 돌아가기 싫을 정도다. 
 
가호는 연애 따위의 성가신 일에서 일찌감치 손 씻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정말 잘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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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비스킷 깡통을 열게 될 것이다. 뻔하다. 과거가 현재를 야금야금 파먹어, 또 날을 새우리라. 그다지 불행한 시간은 아니지만, 그러고는 다시 현재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러기 위한 에너지와 아픔을 생각하면, 가호는 겁이 난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자신을 현재에 붙잡아 주었으면 싶었다. 옆에서 걸어가는 사람이든, 그 옆 사람이든, 그 옆의 옆 사람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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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얘기 좀 해봐."
"어렸을 적 얘기라. 그렇게 듣고도 싫증을 안 내네."
고개를 숙이고 슬그머니 웃는 세리자와의 모습에 시즈에는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형의 등에 업혀서 놀았던 이야기, 비닐 주머니에 담아 먹었던 누에콩 간식 이야기. 시즈에에게 세리자와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마법이다. 멀고 쓸쓸하고 꿈같은 이야기. 세 살짜리 세리자와와 다섯 살짜리 세리자와, 열 살짜리 세리자와를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시즈에는 마음 속에서 눈을 어렴풋이 뜨고, 자신들이 떨어져 살았던 때의 흐름을 눈부신 무엇을 보듯 바라본다. 그리고 백 년쯤 떨어져 있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시간을 공유할 수 있고, 같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플레인 오믈렛을 절반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시즈에는 아주 자연스럽게, 지금 이대로 이 사람 곁에서 나이를 먹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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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가호를 만나도 세리자와 얘기는 하지 말자. 만날 때마다 남자 얘기만 하는 저속한 여자 친구는 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자신이 그런 여자가 되면 가호도 물론 경멸할 테지만 그보다는 세리자와가 딱하다. 세리자와에게는 홀로 독립할 수 있는 여자가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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