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배우고 생각하고/밑줄긋기

[데브리북]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데브리 2023. 5. 22. 02:03

 

 

 

박노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

한계선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더는 나아갈 없다 돌아서고 싶을

고개 들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라

 

여기서 돌아서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너는 도망치게 되리라

 

여기까지가 한계라고

스스로 그어버린 한계선이

평생 너의 한계가 되고 말리라

 

옳은 일을 하다가 한계에 부딪혀

그만 금을 긋고 돌아서고 싶을

묵묵히 황무지를 갈아가는 일소처럼

 

꾸역꾸역 너의 지경을 넓혀가라

 

 

 

 

 

 

 

 

-

아니다

 

억압받지 않으면 진리가 아니다

 

상처받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저항하지 않으면 젊음이 아니다

 

고도가지 않으면 혁명이 아니다

 

 

 

 

 

 

 

 

-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인생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나는 너무 서둘러 여기까지 왔다

여행자가 아닌 심부름꾼처럼

 

계절 속을 여유로이 걷지도 못하고

의미 있는 순간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만남의 진가를 알아채지도 못한

 

나는 이렇게 삶을 서둘러 왔던가

달려가다 스스로 멈춰 서지도 못하고

대지에 나무 그루 심지도 못하고

아닌 아니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했던가

 

나는 너무 빨리 서둘러 왔다

나는 삶을 지나쳐 왔다

나는 나를 지나쳐 왔다

 

 

 

 

 

 

 

 

-

여행은 혼자 떠나라

 

여행을 떠날 혼자 떠나라

사람들 속에서 문득 내가 사라질

난무하는 말들 속에서 말을 잃어

달려가도 멈춰서도 앞이 보일

그대 혼자서 여행을 떠나라

 

존재감이 사라질까 두려운가

떠날 있는 용기가 충분한 존재감이다

 

여행을 떠날 혼자 떠나라

함께 가도 혼자 떠나라

 

그러나 돌아올 둘이 손잡고 오라

낯선 길에서 기다려온 다른 나를 만나

돌아올 둘이서 손잡고 오라

 

 

 

 

 

 

 

 

-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

 

그는 포도나무에 

물을 백바가지씩 주었다

 

그녀는 포도나무에

물을 바가지씩 주었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비슷한 때에

비슷한 포도송이를 매달았을

 

허망하지 않은가

삶에서 달콤한 기뿜의 포도송이를 따먹는 일에

그렇게도 많은 물이 필요한가

 

적은 것으로 있는 것을

많은 것으로 이루는 것처럼

바보 같은 짓은 없다

 

삶은

때론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

 

 

 

 

 

 

 

 

-

두가지만 주소서

 

나에게 오직 가지만 주소서

내가 바꿀 있는 것은 그것을 바꿀 있는 인내를

바꿀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일 있는 용기를

 

나에게 오직 가지만 주소서

나보다 약한 앞에서는 겸손할 있는 여유를

나보다 강한 앞에서는 당당할 있는 깊이를

 

나에게 오직 가지만 주소서

가난하고 작아질수록 나눌 있는 능력을

성취하고 나갈수록 책임을 다할 있는 관계를

 

나에게 오직 가지만 주소서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삶에 뿌리 박은

깨끗한 마음 하나만을

 

 

 

 

 

 

 

 

-

나무가 그랬다.

 

비바람 치는 나무 아래서

찢어진 생가지를 어루만지며

또한 지나갈 거야 울먹이자

 

나무가 그랬다

 

정직하게 맞아야 지나간다고

뿌리까지 흔들리며 지나간다고

 

시간은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고

이렇게 무언가를 데려가고

다시 무언가를 데려온다고

 

좋은 때도 나쁜 때도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아니라고

뼛속까지 새기며 지나가는 거라고

 

비바람 치는 산길에서

나무가 그랬다

나무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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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읽어봐도 이렇게나 좋은 시집.

잊고 있었는데 박노해님의 다른 시집도 읽어봐야겠다. 좋은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