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배우고 생각하고/밑줄긋기

[데브리북] 황주리, 세월

데브리 2023. 6. 4. 12:17

 

 

황주리,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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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계절은 맞을 때마다 처음인 듯한 생각이 들까? 더위도 추위도 샐쭉한 봄기운도 가을의 선선함도, 모두 처음 겪는 온도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듯 모든 사랑도, 모든 삶의 기쁨과 고통의 순간들도, 번도 겪은 없는 새로운 처음으로 우리의 살갗에 낯설게 부딪힌다. 그래서 연습이란 소용이 없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우리가 가장 열망하는 순간은 녹록지 않은 속에서의 완전한 소통의 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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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가을, 나는 번의 생일을 맞으며 마흔네 개의 삶의 계단을 숨가쁘게 올라온 기분이 든다. 여든 개나 아흔 개에 비하면 아이들 걸음마 같을까? 아니 아흔 개나 개도 금세일 것만 같다. 세월이 가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스물다섯 때까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대학을 졸업할때까지였을지 모른다. 그때까지 나는 인생을 완전히 탕진한 기분이 든다. 스물다섯에 명작을 남기고 죽은 화가 모딜리아니를 생각하면, 아니 일찍 죽은 모든 천재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미안한 일이다.

 

(중략)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은 나이, 스무 살에 동반 자살도 하지 않고, 방화범이 되지도 않고, 데모도 하지 않고, 모딜리아니처럼 명작을 남기고 절명하지도 않고 정말 너는 무엇을 했지? 생각해보니 시절 나는 아무 짓도 하고 그저 살아남는 연습을 했던 같다. 교수님이 무슨 소리를 해도 내기, 지겹고 덧없는 삶을 친구처럼 받아들이기, 수용소에 갇힌 '이반 데니소비치'처럼 땡땡이를 치고 수업 시간을 빠져나온 오후의 구름 없는 파란 하늘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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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만 시간을 뒤로 돌릴 있다면, 우리는 전혀 다른 길로 걸어가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모든 사람의 길은 10 아니 20년을 거꾸로 돌릴 있다 한들, 지금의 길로 다시 수밖에 없을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있는 지금 장소는 원했든 원치 않았든 간에 우리가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의 장소가 아닌가?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후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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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중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은 물론 결혼이고, 번째는 서로에게 그저 남보다는 조금쯤 편안한,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드는 탓일까? 그것이 썰렁하고 씁쓸한 감정이 찌꺼기들을 조금씩 버려가는 허무의 과정이라 해도, 노화와 죽음의 원리를 닮은 남녀 간의 사랑의 추억에 관해 우리가 지닐 있는 최고의 예의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느날 당신이 죽는다 해도 문상을 가서 정말 슬픈 마음으로 울어줄 사람들이 되고 싶은 것이다. 옛날 불처럼 타오르던 마음이 식고 식어 이상 서로에게 아무런 전율도 안겨주지 않는 시든 장미 다발이라 해도, 언젠가 같이 했던 시간들 때문에 서로에게 결코 아무것도 아닐 없는,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의 가는 길을 지켜 보아주는 일은 얼마나 귀한 일인가? 그러나, 또한 성숙한 인간들에게만 가능한 몹시 드물고 귀한 인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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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상대로부터 아프게 버림받기도 하고, 한때는 사랑했던 상대를 아픔 없이 버리기도 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늙어간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나고 보면 자신의 역할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그저 흘러간 시간만 저만치 있다. 어떤 사랑도 그리 오래 머무르지 않고 정말 봄날은 간다. 그렇게 우리들의 삶도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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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세월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줌의 모래처럼 느껴진다면, 혹은 매순간 우리를 노쇠하게 만드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우리는 불행하다. 그러나 반대로 흘러가는 세월이 우리를 완성시키고 있다고 여기면 행복을 느낄 수도 있으리라." -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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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로 바빴고, 별로 재미도 없는 일로 분주했던 젊은 ... 우리는 나중에야 깨닫는다. 무엇이 가장 소중한 일인지를.

 

(중략)

 

우리가 소중한 것을 소중한 알며, 순간 소중한 것을 아끼고 공들이는 삶을 있다면 인생은 후회하지 않는 인생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발짝 늦는 아닐까? 뒤돌아보면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생을 걸고,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하며 탕진하는 아닐까? 소중한 것들은 자리에 있으리라 홀대하는 것은 아닐까?

더욱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남들이 알아주는 명함을 갖기 위해, 자식을 명문 대학에 보내기 위해, 정체도 없는 그림자와 싸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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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어제가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어제의 생각을 오늘까지 간직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니 오래 사랑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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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결혼이란 늦게 할수록 좋은 건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를 결혼해서 낳고 살아야 그냥 살아지는 거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의 삶이 번뿐이라는 사실을 처음 사실인 떠올릴 때마다 섬뜩해진다. 그저 아무 데나 무겁다고 보따리를 내려놓는 것이 사는 법이라면, 그보다 아무렇게나 산들 무슨 상관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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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들을 티스토리에 옮기며 정리하고 있는데 지금 다시 읽어도 깜짝 놀랄만큼 좋은 책들을 많고, 이렇게 좋은 책들 중 일부는 안타깝게도 절판되기도 했다는 것에 또 한번 깜짝 놀라고 있는 중. 한국에 살았다면 웹개발이 웬 말이냐, 아마 어디 구석에서 80, 90년대 한국 소설이나, 산문집, 수필에 파묻혀 살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