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읽고 싶어서 리스트에만 넣어두고 이제서야 읽어본 줌파 라히리의 <이름 뒤에 숨은 사랑>. 어떤 내용인지는 전혀 모르고 읽었는데, 한국을 떠나 생각지도 않게 캐나다에서 오래 자리 잡고 살고 있는 나 스스로에게도 가끔 보이는 모습과 나도 종종 느끼는 감정들이 책 곳곳에 숨어있어서 밤마다 눈물 콕콕 찍어가며 완독했다.
인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쇼크(아버지)의 끔찍한 사고로 인해 바뀐 인생관, 그런 아쇼크라는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하며 생각지도 않았던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한 아시마(어머니). 그 사이에서 미국인으로 태어났으나 부모님이 가진 인도식 가치관과 본인을 둘러싼 미국 가치관 사이에서 자라나는 고골리(아들)와 소냐(딸).
고골리가 자라며 겪는 정체성의 문제는 나라는 달라도 어느 곳이건 이민 2세대가 겪는 공통적인 문제이며, 성인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간 아쇼크와 아시마가 살며 느끼는 감정은 본인이 태어난 나라를 떠나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감정과 닮아있다. 인도보다 훨씬 더 깨끗하고 발전되고 편한 나라에 살면서 본인들만 편하게 누리고 있는 삶에 대한 죄책감, 부모님을 자주 뵙지 못하고 더 이상 해드릴 것도 없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아무리 편하고 좋아도 태어난 나라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익숙한 것들에 대한 그리움.
아시마는 요즘 들어 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 임심한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림은 끝도 없고, 언제나 버겁고, 끊임없이 남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이다. 한때는 평범했었던 삶에 이제는 불룩하게 괄호가 하나 삽입되었고, 이 괄호 속에는 끝나지 않는 책임이 들어 있었다. 이를 통해 이전의 삶은 사라지고 말았다는 것, 그 삶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힘든 무엇인가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임신했을 때처럼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호기심과 동정심, 이해심이 묘하게 뒤섞인 감정을 자아내는 어떤 것이라고, 아시마는 생각하였다.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데까지 우리가 같이 왔었다는 것을, 너와 내가 여기까지 함께 왔었다는 것을 기억해라."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끔가다 그를 생각하면 어떤 패배감과 함께 그녀가 거부했던 종류의 삶, 그토록 잊으려고 애썼던 종류의 삶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삶에 대해 진정으로 존경하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잘되든 못되든 고향에 등을 돌릴 수 있었던 그 능력이었다.
[옮긴이의 말] 에서
언제나 우리의 알몸을 덮어 씌우고, 타인이 우리를 판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는 의복이라는 것이 사라진 맥락에서 몸이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이른바 '문화'와 고골리라는 존재의 갈등 상황은 모슈미와의 삶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모슈미의 친구들과 함께 한 저녁 식사에서, 친구들은 아이의 이름에 대한 대화를 벌인다. 특정한 기호(취향)를 가지는 것이 삶의 전부인 듯한 '특징 있는' 친구들에게 아이의 이름이란 그들의 세련된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특정한 제과점에서 특정한 빵을 고르는 것과 같은 '완벽한' 선택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가끔 여행하다 만나는 한국 사람들로부터 '와- 캐나다에 살면 얼마나 좋을까?', '공기도 좋고 삶의 질도 훨씬 좋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곤 하지만, 막상 살아보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이곳이 온전한 '집'이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 것 같다. 벌써 1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나 조차도 한국과 캐나다를 비교하라면 캐나다가 훨씬 성향에 맞는 편이라 정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음에도 가족과 떨어져 있고, 어려서부터 함께 커온 친구들과 떨어져 사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은 늘 있다. 물론 이곳에서도 사람을 사귀고, 어느 정도 안정된 울타리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내가 이곳에 깊이 뿌리내리고 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몇 년에 한 번씩은 꼭 '아 그냥 다 정리하고 한국 갈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렇게 어디든 아직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캐나다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들은 한국으로 가끔 여행을 가기는 해도, 삶의 터전을 정말 옮기겠다는 결심을 하는 건 쉽지 않으니까.
요즘 마음이 힘든지 <파칭코>도 그렇고 <이름 뒤에 숨은 사랑>도 그렇고 이민자들의 삶이 배경인 소설들을 읽을 때마다 눈물 쏙 빼며 읽게 된다. 이 살기 좋다는 캐나다에서 편하게 살고 있으면서도 가족과 떨어져 사는데서 오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토론토는 아직도 기나긴 겨울의 막바지라 더 힘든 시기이기도 하고, 구직하는데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고 여러모로 지치는 요즘인데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며 위안도 받고, 공감이 많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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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The Namesake이라는 영어 제목보다는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이라는 한국어 제목이 개인적으론 훨씬 더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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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혼자 상상했던 모슈미의 이미지는 검색하다 우연히 발견한 영화판 모슈미보다는, 작가 줌파 라히리의 이미지와 쏙 빼닮아있었다.
2022.06.21 -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독서의 기록] - [데브리북] 줌파 라히리, 축복받은 집
2022.08.08 - [읽고 배우고 생각하고/독서의 기록] - [데브리북] 줌파 라히리, 그저 좋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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